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레타 섬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공수부대의 생명은 불시의 기습이야. 그게 없어지면 평범한 보병보다 못하지. 자네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네. >----- >아돌프 히틀러,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에서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에게 겉으로 보기엔 명백한 '''영국군의 패배'''였다. 끝끝내 '''크레타 섬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으며, 영국군 4,000여 명이 전사하고 17,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뿐만 아니라 10여 척의 함정이 격침되거나 파손되었는데 이중에는 순양함 3척 격침 피해에 항공모함 포미더블 대파, 전함 워스파이트 중파와 같은 핵심 주력함 피해도 있어서 한동안 지중해 해상작전에 커다란 제약이 있을 정도였다. 이는 이탈리아 잠수정에 의한 퀸 엘리자베스 대파, 유보트에 의한 바함 격침으로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나치 독일]]의 [[피로스의 승리|상처뿐인 승리]]라는 것이 후대의 평가이다. 독일군 제7공수사단은 전면 재편성에 들어가야 했으며 [[1939년]] 이후 크고 작은 전역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 공수부대원들 4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로써 독일군 공수부대는 대규모 작전을 벌일 능력과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작전에 투입한 수송기 다수까지 상실하여 추가적인 공수부대 훈련도 어려워졌다. 결국 이게 원인이 되어, 독일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수작전다운 공수작전은 하지도 못한 채 몰타를 점령하지 못해 아프리카 전선을 말아먹고 최정예라 불리던 공수부대들은 일반 보병전투에서 소모되었다. 독일군 최후의 공수작전은 [[벌지 대전투]]때 이루어졌는데, 크레타에서 입은 소모를 끝내 회복하지 못하여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참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의 손실로 말미암아 [[몰타 항공전|몰타를 점령 못 하는 사태]]까지 번지자 결국 보급의 한계에 직면한 아프리카 군단은 전멸한다. 크레타 섬을 점령한 주둔군 자체적으로도 보급상황은 좋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히틀러가 크게 벌여놓은 [[독소전쟁|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면서 독일군은 지중해 및 북아프리카 전선 전반에 안정적 전선을 구축할 수 없게 되었다. 점령한 크레타 주둔군 또한 [[게릴라]]들의 저항에 직면해야했고 와중에 북아프리카 전선에 주둔군 병력으로 충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은 궤멸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면서 크레타 섬에도 연합국의 반격이 이어졌고, 크레타 섬이 사실상 거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종전까지 독일군은 크레타 섬에서 철군하지 못했고 종전이 되어서야 해산되었다. 한편 나치 독일 점령기간에 크레타 섬에서의 게릴라, [[빨치산|파르티잔]] 진압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많은 대량학살 사건이 있었다. 때문에 침공 당시의 학살과 포함하여 크레타 섬 전투를 지휘하고 주둔군 사령관을 보낸 공군 [[쿠르트 슈투덴트]] 상급대장, 육군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 보병대장, 공군 [[브루노 브로이어]][* 브로이어는 비교적 인도적(?)인 정책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군들의 학살범죄로 인해서 총살당했다.] 공수대장 등은 전후 기소되었고 슈투덴트[*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5년형.]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군들은 그리스 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선전부 [[장관]]의 양아들 [[하랄트 크반트]] 공군 [[소위]]도 이 전투에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후 연합군은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과 같은 실수를 하며 공수부대를 말아먹기는 하였으나 빠르게 정신차리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공수부대를 운용했다. [[분류:서부전선(제2차 세계 대전)/전투]][[분류:1941년 전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